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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원뜻성경(79)] 부당한 심판에 대한 질문 (창세기 18장 25절)히브리어(구약성경) 2022. 8. 23. 09:36
חָלִ֨לָה לְּךָ֜ מֵעֲשֹׂ֣ת כַּדָּבָ֣ר הַזֶּ֗ה לְהָמִ֤ית צַדִּיק֙ עִם־ רָשָׁ֔ע וְהָיָ֥ה כַצַּדִּ֖יק כָּרָשָׁ֑ע חָלִ֣לָה לָּ֔ךְ הֲשֹׁפֵט֙ כָּל־ הָאָ֔רֶץ לֹ֥א יַעֲשֶׂ֖ה מִשְׁפָּֽט
That be far from thee to do after this manner to sl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and that the righteous should be as the wicked that be far from thee Shall not the Judge of all the earth do right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장 25절)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를 듣는 중 아브라함의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떠나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실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아마도 그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자신의 조카 롯이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1. 부당한 심판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로서 그 분의 권위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그 분의 말씀이 법이고 죄와 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심판은 언제나 옳으며 어느 누구도 그 분이 하시는 일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시는 여호와를 급히 붙잡고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사실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부당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담대하게 이 말을 하나님께 전했는데 이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입니다. 개역개정에 "부당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חָלִ֨לָה לְּךָ֜(발음: 하릴라 레카)인데 חָלִ֨לָה(발음: 하릴라)는 "결단코 아니다"라는 의미를, לְּךָ֜(발음: 레카)는 "당신에게, 당신을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로 다시 써보면 "(이 일은) 당신을 위해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또는 "(이 일은)당신에게 결코 맞지 않습니다"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 질문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동일하게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 공의를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의롭지 못한 심판, 곧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맞지 않다는 것을 조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조카 롯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전에 전쟁으로 인해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전쟁에 참여했던 그의 행동을 볼 때 그는 분명히 의인인 조카 롯을 구원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50명으로부터 시작해서 10명에 이르기까지 의인의 수를 줄여가며 하나님의 심판을 보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의 행동이 사람의 협상과 얼마나 비슷하냐면 창세기 18장 27절에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히브리어로 הוֹאַ֙לְתִּי֙(발음: 호알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다, 착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분위기를 고려해보면 앞선 문장은 "제가 지금부터 한 번 말해 보겠습니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모르는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든 롯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거듭해서 제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제안을 끝까지 다 들어주셨고 또 승인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큰 도시에 의인 열 명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며 "중보기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믿지 않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는가. 세상이 위험하고 개인주의가 안전하고 편하다보니 우리 마음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됩니다. 아울러 중보기도의 대상에 하나님을 포함하고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그 분을 위한 중보기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 분의 영광을 위해 평소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선한 마음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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