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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글이 없었던 이유...히브리어(구약성경) 2024. 1. 14. 00:06
제 블로그를 구독해 주시고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아 궁금하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사실 갑작스럽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생각하는 일마저도 소홀히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아버지를 주님 품으로 보내고 개인적으로 느꼈던 일들을 교회에서 나눴습니다. 조금은 긴 글일 수도 있지만 아래와 같이 남겨 놓으니 시간되실 때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아버지를 보내고 알게 된 것들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시간이 좀 흘렀지만 저희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 주시고 많은 위로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많은 성도님들의 눈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 때 성도님들이 계셔서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도님들의 사랑을 느끼면서 한 가지 강하게 마음에 새긴 것은 ‘나도 누군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을 다해 도와줘야 되겠다’였습니다. 언젠가 성도님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저도 꼭 그 자리에서 성도님들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버지를 보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성도님들과 나누는 것이 유익이 될 것 같아 간증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간증은 성도님들께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최근에 느꼈던 것들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간증을 통해 성숙하지 못한 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저의 부족한 지식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모습이 보인다고 할 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람들의 실패를 보며 공감과 위로를 받듯이 저의 그런 모습들을 통해 성도님들도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감정들이 이런 자리를 통해 드러남으로 서로 격려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버지를 보내며 알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 둘째는 죄에 대한 것, 셋째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것부터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깊이 있는 성경연구는 겉으로 쉽게 알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깨닫게 해줍니다. 저는 때로 원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기록하신 내용들의 의미를 알아보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떤 분위기와 뉘앙스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지 깨닫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경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나아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을 정리하여 주어지는 말씀 시간에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이 아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저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가장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영역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즉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은 출애굽기 QT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알아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고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기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귀한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도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런 마음이 든 이후로 더욱 간절히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집과 회사와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집이 회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한 가지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출근하는 시간에 항상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제목은 주보에 있는 기도제목을 포함하여 아주 다양한데 가끔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매일 한 가지의 주요한 기도제목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조금 큰 병이 걸리신 분들의 회복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수요집회의 기도 시간에는 대중 앞에서 기도하다 보니 약간의 격식을 차리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기도 시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님을 위해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 회복시켜주지 않으시면 저 진짜 마음 어려워집니다. 저 삐뚤어질 겁니다.’ , ‘주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빨리 그 분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셨는지 많은 분들이 회복됐고 저는 하나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젠 다른 성도님들이 아니라 제가 그 은혜를 경험할 때가 되었습니다. 암으로 너무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더욱 기도에 매진했습니다. 기도할 때는 믿음을 가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차도가 없고 오히려 항암 주사 부작용이 있을 때는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어느 날 출근하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마음 속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저도 동일하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아버지가 회복되실 텐데요…”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니 물리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이루어주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성경을 통해 볼 때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희 아버지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께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다. 주님. 제가 너무 어려운 일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고쳐주소서.’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중간 과정의 CT 결과 고관절 쪽의 종양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희망을 갖고 저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뇌쪽에 이상현상을 보이셨고 기억이 잘 안난다고 말씀하시며 병원에 입원하신 후 갑작스런 병세의 악화로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새벽에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고 부모님 댁으로 가는 길에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빨리 도착해서 응급실로 모시고 가야 되겠다.’ 그런데 중간중간 휴대폰으로 이상한 연락들이 올라 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저도 이제 정신이 없습니다. 정말 사고가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빠르게 운전해서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니는 울고 계시고 119 구급대원은 도착했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119 구급대원이 긴박하게 응급조치를 하고 병원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이미 숨을 거두셨고 방 안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습니다. 아버지께서 누워 계신 곳을 가보고 아버지를 보니 주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흔들면 깨어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살짝 흔들어 보았습니다. 안 일어나십니다. 그래서 조금 더 세게 흔들어 보며 불러 보았습니다. 아무 움직임도 없습니다. 저는 돌아가셨다는 것이 인식이 안되는데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 누워 계신 곳 앞에서 앉아서 혼자 말을 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그리고 또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아버지는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나사로는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도 다시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는 일은 없었고 우리 가정은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정신적으로 많이 당황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지는 않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시지 않으시죠. 사실 그런 측면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가야 하는 길로 가셨을 뿐이고 그 시간이 조금 더 일찍 왔을 뿐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예상할 수 없죠. 시기와 방법, 그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당황스러운 부분은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이시고 제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비추어 무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 일을 왜 들어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육신의 아버지의 고통으로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도 응답의 조건, 곧 믿음과 간절함, 그리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분 앞에 제가 생각하는 것이 부족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일이 결국 이렇게 되었을 때 여러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제 머리와 마음을 꽉 채웠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것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은 적용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저의 기도는 제 정욕을 위한 기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함께 이 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기도의 시기에 깨달았던 말씀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더욱 큰 신뢰를 갖게 했습니다. 제가 가진 믿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마음을 가득채울 때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무언가를 위해 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가”, “나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서기를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오히려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언가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받아들일 줄 아는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 아닌가.”
이처럼 기도에 대한 많은 생각이 들 때,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가 생각이 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할 수만 있다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를 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도님들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자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돌아와도 불쌍히 여기며 달려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7장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준다고 말하며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애초부터 안될 것을 말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감정을 토로한 것일 뿐일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로부터 옮기실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으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깊이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간절함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으니 아무 것도 아닌 저의 간절함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기도의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소망이었나 봅니다. 우리는 때로 무언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너무나 합당합니다. 자신의 간절함이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하나님의 뜻만이 서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순종입니다. 진노의 잔을 기꺼이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받을 줄 아는 순종이 요구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연약한 우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나아가 한 가지 더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선은 “착하고 옳은 것”일 지도 모르지만 사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선입니다. 하나님 편에는 선이고 그리스도 편에서는 고통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서 선은 때로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는 큰 아픔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셨고 저는 하나님의 자녀일 지라도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아버지는 선을 행하시고 아들을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가요. 이렇게 되다 보니 그 분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해집니다. 제가 갖고 있던 아버지란 단어의 의미에서 볼 때는 말이지요. 아버지라는 단어는 정말로 친근함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빛의 자녀”라는 말,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말. 그런 표현들 속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의 거룩한 의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어떻게 아들인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중요한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계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경외하는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일을 통해서 저는 제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표현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피부로 와닿지 않았던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 단에 올라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렇게나 나눌 수는 없기에 항상 많은 연구와 기도를 병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었고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 생각 이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문득 욥이 생각났습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는 이어지는 재앙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두 문장을 통해 욥은 하나님에 대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고상하고 좋게 여겨지는 지식이자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의 장시간에 걸친 토론이 진행됩니다. 그것은 성도님들이 아시는 대로 욥기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긴 대화입니다. 그 대화의 요점은 욥에게 미친 일이 무엇때문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말하고 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쟁은 한 가지 특정한 주제에 대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누가 더 올바르게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욥은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대화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왜 이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께서는 반대로 질문을 던지시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욥에게 나타내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역시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지식으로 얻은 것은 “겸손과 순종 그리고 용납”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인정하고 그가 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 우리는 그것을 용납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가진 지식 속에서 매몰되면 감정은 터지고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나 스스로는 많은 것을 계획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계획하는 바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이 확고하다면 더욱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욥 역시 유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저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이 계속해서 터져 왔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죠.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크신 계획을 갖고 계신데 말입니다.
몇 일 전에 차를 가지고 일을 보고자 여기저기 다니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정해진 일이라서 조금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 날 따라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신호도 많이 걸립니다. 우회전을 해서 빠르게 지나가려고 하는 순간, 신호가 걸리고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오기 시작합니다. 그 보행자들은 여러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중고등 학생, 노인분들, 외국인. 어떤 사람은 빠르게 걷고 어떤 사람은 신호가 거의 끝나가는데도 아직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바빠도 그 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의 규칙이고 이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입니다.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일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일도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이시고 내 사정을 귀하게 생각하시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사정도 귀하게 여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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